정보라 저주토끼 세계 3대 문학상인 부커상 최종 후보 지명작
한국 SF/판타지의 펄떡이는 심장 정보라의 4년 만의 신작 소설집
정보라의 저주토끼(2017)가 2022년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분 최종 후보 지명작에 선정되었다는 즐거운 소식이 있었습니다. 1969년부터 시상해 온 부커상은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자, 노벨상과 콩쿠르상과 더불어 세계 3대 문학상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연방 작가들이 영어로 쓴 소설들을 대상으로 선정하여 매년 수여해 온 상인 데요.
2005년부터는 영연방 지역 외에 작가가 쓴 소설을 대상으로 하는 인터내셔널 부문이 신설됐고, 2016년 작가 한강이 <채식주의자>로 아시아 최초이자 최연소로 맨부커(2019년까지는 맨부커상)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소설가 정보라 프로필
연세대 인문학부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러시아어를 전공하여 한국에선 아무도 모르는 작가들의 괴상하기 짝이 없는 소설들과 사랑에 빠졌다.
예일대 러시아동유럽 지역학 석사를 거쳐 인디애나대에서 러시아 문학과 폴란드 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붉은 칼》 등이 있고, 《안드로메다 성운》 등 많은 책을 옮겼다. -출판사-
2022년 부커상에는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도 1차 후보에 올랐으나, 아쉽게도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만 최종 후보에 올랐습니다.
정보라의 소설집은 한국문학 번역가 '안톤 허'에 의해 2021년 여름 영국에서 출간됐고, 올해 최종 후보 6편에 뽑혔습니다. 안톤 허는 번역가로서 부커상 후보에 올랐습니다.
그는 대도시의 사랑법도 번역했는데, 두 작품이 부커상 후보에 올랐던 것으로 보아 작품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커상은 상금이 5만 파운드(한화 약 8천만원)인데요. 국제상은 작가와 번역가에 반씩 나누어 줍니다.
호러와 SF 판타지 단편 10편을 수록한 정보라의 소설집은 수록작품 모두 수준이 고르고, 읽는 이에게 섬뜩하고 짜릿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야기들입니다.
토끼 인형이 끊임없이 복수를 실천하고, 변기에서 머리가 나와 '어머니'라고 부르는가 하면, 생리불순으로 피임약을 먹은 처녀가 임신을 하는 웃지 못할 이야기들이 쉼 없이 펼쳐집니다.
부커상 최종 수상작은 오는 5월 26일 발표된다고 합니다. 정보라 작가를 열심히 응원하면서 간단한 줄거리와 리뷰를 올립니다.
수록작품 10편
표제작 '저주토끼' 줄거리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첫 문장이 너무 좋습니다. 아주 옛날, 어느 시골집에서 할아버지, 혹은 할머니가 손자에게 말하는 듯한 비장한 정감이 살짝 묻어납니다. 전래동화를 읽는 기분이랄까요.
할아버지는 늘 말씀하셨다. “저주에 쓰이는 물건일수록 예쁘게 만들어야 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할아버지와 '나'는 공식적으로는 대장간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것이 본업인 집안입니다. 진짜 본업이 무엇인지는 동네 사람들도, 동네 아이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요.
그리고 대대로 저주 용품을 만드는 집안의 불문율은 개인적인 용도로 저주 용품을 만들어서도 안되고, 가업으로 만든 물건을 개인적인 저주에 사용해서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소설 <저주토끼>는 할아버지가 그 불문율을 오래전 어겼던 이야기를 매일 밤 손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적 술도가의 아들과 친구가 되었고, 그 친구는 가업을 물려받아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손으로 술 빚던 전통의 유산을 이어받아 옛 맛도 살리고, 몸에도 좋은 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여 회사를 성장시킵니다.
그런데 이미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변해버린 술 시장을 넘보는 더 큰 회사가 있었습니다. 정부 인사와의 친분과 인맥에 강하고 접대에 능한 그 회사는 알코올에 물과 감미료를 섞은 그 액체를 '서민들이 선호하는 정통의 그 맛'이라 광고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친구 회사에서 만든 술에 '공업용 알코올을 섞는다고, 그 술을 마시면 눈이 멀고 불구가 되며 많이 마시면 죽는다'라고 뒤에서 유언비어를 퍼뜨렸습니다.
할아버지 친구 회사는 매출이 뚝뚝 떨어지고 공장이 가동을 멈추었습니다. 아무리 해명해도 통하지 않았고, 법원에서조차 근거가 없다며 비방한 회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친구는 사업과 소송 양쪽에서 막대한 빚만 짊어지게 되었고, 삼십 대의 젊은 나이에 가족에게 미안하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었습니다. 도산해버린 할아버지 친구의 회사와 공장, 설비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그 회사가 헐값에 가져갔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친구를 위하여 저주토끼를 만든 것입니다. 이 행위는 집안의 불문율을 어기는 것이었지만, 할아버지는 착한 친구를 위하여 대신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 앞으로 할아버지가 토끼인형을 어떻게 만들어 복수를 어떤 방식으로 해 나가는 것일까? 상상해보면서 이야기를 읽어나갔는데, 정보라 작가의 상상력은 훨씬 깊은 층위에서 강력하게 복수하도록 토끼 인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몸쓸 회사를 하나하나 차례대로 복수해 나가는 줄거리를 따라가는 즐거움이 짜릿하고 통쾌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아주 짧은 단편 속에 이토록 섬뜩하게 복수하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니 읽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번째 단편 '머리'
두 번째 단편 <머리>는 변기 속에서 자신의 분신이 자라나는 섬뜩한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어느 날 물을 내리고 화장실을 막 나오려 하는데, 변기 속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머니.”
주인공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이 피조물은 긴 세월 동안 주인공의 배설물과 오물을 받아먹으며 주인공을 닮아가고 드디어 몸을 이루는 데 성공합니다. 단편, <머리>는 오늘날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풍자하는 기괴한 호러라고 할까요?
네 번째 단편 '몸하다'
<몸하다>는 소설집 중에서 가장 킥킥거리며 읽었던 단편입니다. 몸하다는 월경이 나오다, 월경을 치르다라는 뜻입니다.
주인공인 나는 생리 20일이 넘게 피가 멎지 않아 병원을 찾습니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호르몬에 이상이 생겨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되는 경우가 있으니 일단 피임약을 먹어보라고 권합니다.
"3주 먹고 1주 끊고, 또 3주 먹고 1주 끊고, 그렇게 두세 달만 하면 정상으로 돌아올 겁니다."
아, 나 원참, 이런 의사도 있으려나요? 그런데 그렇게 두달 먹고 약을 끊으면 또 생리를 시작하는 겁니다. 그래서 다시 약을 먹고, 끊고 다시 먹기를 반복하여 결국, 6개월이나 피임약을 먹고 정상으로 돌아왔는데요.
문제는 그 뒤, 병원에서 '임신'이라는 진단을 내리는 겁니다. 애인도 없는 처녀인 나에게요. ㅎㅎ 참고로, 피임약을 처방한 의사와 임신을 진단한 의사는 다른 의사입니다.
의사 왈, 달걀의 무정란과 유정란을 비교하며 빨리 아빠를 찾아야 된다고 다그칩니다. ㅋㅋ 아, 단편 <몸하다>는 끝날 때까지 배꼽을 잡아야 하고, 마지막에는 주인공의 울음소리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소설입니다.
다섯 번째 단편 '안녕, 내 사랑'
다섯 번째 단편 '안녕, 내 사랑'은 반려로봇 개발자의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나는 내가 개발한 1호 로봇을 내가 만든 반려자라고 여길만큼 크나큰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신상 반려로봇들을 구입하지만 나는 여전히 1호를 옷장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결말의 문장을 캡쳐한 것입니다.
인간과 로봇과의 관계, 인간과 대체물로서의 로봇, 유한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서글픔이 잘 녹아 있는 작품입니다.
여섯번째 단편 '덫'
'이것은 오래전에 어디선가 읽은 이야기이다'라는 작가의 시작 말처럼 여섯 번째 실린 단편 '덫'은 전래동화를 읽는 느낌이 드는 소설입니다. SF/판타지의 펄떡이는 심장이라는 정보라 작가의 섬뜩한 상상력이 무섭게 휘어잡는 작품입니다.
황금의 피를 흘리는 여우와 그 여우를 잔인하게 이용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여우의 복수가 완결될 때쯤 인간의 욕심은 어디까지인가를 돌아보게 만드는 단편입니다.
일곱 번째 단편 '흉터'
정보라 소설집에서 가장 긴 단편이자, 정보라 작가의 무협적인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마을 사람들에 의하여 제물에 받쳐진 소년이 마침내 복수에 성공하지만, 그 순간 마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립니다.
'흉터'의 마지막 문장을 읽으면 묘하게도 카뮈의 <시지프스 신화>가 떠오릅니다.
아홉 번째 단편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
단편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는 정보라 작가의 SF적 감수성이 빛나는 작품입니다. 모래사막 위 허공에는 황금 톱니바뀌로 이루어진 배가 떠 다니고, 초원의 공주는 어느 날 황금배에 오릅니다.
작가의 말에서 정보라는 "원래 세상은 쓸쓸한 곳이고 모든 존재는 혼자이며 사필귀정이나 권선징악 혹은 복수는 경우에 따라 반드시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필요한 일을 완수한 뒤에도 세상은 쓸쓸하고 인간은 여전히 외로우며 이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합니다.
복수를 완수한 뒤에도 세상의 쓸씀함, 존재의 여전한 외로움이 가장 도드라져 보이는 단편이 '바람과 모래의 지배자'입니다.
마지막 단편 '재회'
작가가 말한 바, 이 단편은 독자를 위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나의 남자 친구가 즐겨 부르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 가사는 오랫동안 흥얼거릴 것 같습니다.
"소원을 빌 수 있다면
나는 아주 조그만 행복해지고 싶어
너무 많이 행복해지면
슬픔이 그리워질테니까."
한국 SF판타지 소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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