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추리 소설에 자꾸 손이 간다. 불확실성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어 내다보니 그렇게 된다. 오늘은 애거서 크리스티와 함께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추리 작가로 손꼽힌다는 P. D. 제임스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2018)을 골랐다.
주인공 코델리아 그레이는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죽었고, 철없는 아빠를 둔 덕에 수녀원에서 자랐다. 대학은커녕 임시직을 전전하다 탐정 버니 프라이드와 동업자가 된다. 그녀의 나이는 22살이었고, 버니는 무능하다는 이유는 런던 경시청에서 해고된 경찰이었다.
그러나 동업자 버니는 편지 한 통과 권총 한 자루를 그녀에게 남기고 자살한다. 사설 탐정이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라는 말에도 아랑곳없이 코델리아는 혼자 탐정사무소를 운영해 나가기로 결심한다. 그녀에겐 가족도, 친구도, 믿을만한 인맥도 아무것도 없었지만.
여기까지 주인공 코델리아의 인생과 작가 P. D. 제임스의 성장 배경이 겹친다. 작가 또한 '여자에게 고등교육은 필요 없다'는 아버지를 둔 덕에 17세부터 여러 직업을 전전했고, 결혼했지만 남편이 정신병원에 입원하는 통에 가족의 작가 혼자 생계를 책임졌다고 한다.
사건 의뢰가 도무지 들어올 것 같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어느날 부유한 과학자의 아들, 마크 칼렌더가 자살한 이유를 밝혀 달라는 사건 의뢰가 코델리아에게 들어온다. 꾀죄죄하고 절망적인 탐정사무소 환경을 생각하면 그것은 그녀에게 한 줄기 빛이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중퇴한 마크는 목을 매 숨진채 발견되었는데, 입술에는 자주색 립스틱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시카고 선 타임스는 이 소설을 "문학적 추리 소설의 최공봉"이라 평했다는데, 마크가 죽기 전 살았던 오두막이라든가, 사건 무대가 되는 케임브리지를 묘사하는 작가의 문장들은 추리 소설답지 않게 서정적이고 잔잔하다.
그리고 무일푼의 코델리아 그레이에 대한 묘사도 입체적이고 풍부하여 두려움 속에서 사건의 실체의 다가가려는 그녀의 끈질긴 집념과 용기를 지지하게 된다. 그녀가 꼭 성공하기를 응원하는 마음이 자연스레 든다.
범인을 찾아내기 위하여 마크가 자살한 그 끔직한 장소인 산골 오두막에서 혼자 숙식을 감행하는 코델리아의 무모하게도 보이는 그 집념을 보라. 범임을 추리해 내는 것이 그녀에게는 일이었고, 그 일을 잘하기 위해서 코델리아는 오직 일에만 집중했다. 그러니 두려움도 떨쳐 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추리 소설 본연의 긴장은 조금 떨어진다. '미국 추리작가협회 최고 작품상' 수상작은 아무래도 좀 과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사건의 전개가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더러 보이고 추리가 점프되는 곳도 숨길 수는 없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은 없다. 잔잔하게 전개되는, 좀 문학적인 추리 소설을 원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킬링 타임 하기에 적당한 추리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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